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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모네, 로스코까지 — 거장 8인의 '첫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이렇게 다른 이유

에디터 A
피카소, 모네, 로스코까지 — 거장 8인의 '첫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이렇게 다른 이유
피카소, 피카도르 (1890), 피카소, 자화상, 죽음 앞에서 (1972)
피카소, 피카도르 (1890), 피카소, 자화상, 죽음 앞에서 (1972)

피카소, 모네, 로스코까지 — 거장 8인의 '첫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이렇게 다른 이유

1972년 6월 30일, 파블로 피카소는 크레용을 들고 종이 위에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죽음까지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완성된 얼굴은 해골에 가까웠다. 눈은 놀란 듯 크게 뜨여 있고, 선은 뒤틀리고 거칠었다. 미술사가 피에르 데는 이 그림을 "피카소의 심리를 비추는 거울"이라 불렀다. 여덟 살 무렵 그린 <피카도르>의 단정한 붓질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최근 피카소, 모네, 렘브란트, 터너, 고야까지 — 거장이라 불리는 화가들의 '첫 그림'과 '마지막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같은 사람이 그렸다고 믿기 힘들 만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반응으로 가득했다. 왜 거장들의 커리어 끝자락은, 시작과는 이토록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모네, 루엘의 풍경 (1858), 모네, 장미 덤불 (1925-26)
모네, 루엘의 풍경 (1858), 모네, 장미 덤불 (1925-26)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몸이다. 클로드 모네는 1912년부터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갔다. 1912년 20/50이던 시력(미국식 시력 표기법으로, 한국 기준 약 0.4에 해당)은 1922년 20/200(약 0.1)까지 떨어져 법적 실명 수준에 이르렀다. 초록과 파랑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그는 대신 붉은색과 노란색을 과감하게 끌어올렸고, 그 결과 후기 수련 연작 일부는 마치 "지옥" 같은 색채를 띠었다. 1923년 한쪽 눈 수술을 받았을 때 그는 이 과정을 "끔찍했다"고 표현했다.

렘브란트, 스테판의 순교 (1625), 렘브란트, 시메온과 아기 예수 (1669)
렘브란트, 스테판의 순교 (1625), 렘브란트, 시메온과 아기 예수 (1669)

렘브란트도 비슷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시메온과 아기 예수>는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았고, 배경 인물 일부는 그가 죽은 뒤 제자가 대신 그려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화가의 손이 멈추는 순간까지 그림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로스코, 무제 (지하철) (1937), 로스코, 무제 (검정과 회색) (1969-70)
로스코, 무제 (지하철) (1937), 로스코, 무제 (검정과 회색) (1969-70)

두 번째 이유는 마음이다. 마크 로스코의 마지막 시기 작업인 <무제(검정과 회색)>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화려한 색면 대신 검정과 회색만 남았다. 이 무렵 그는 수년간 이어진 음주와 우울,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 연작을 그린 지 1년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레메디오스 바로, 할머니의 초상 (1926), 레메디오스 바로, 되살아나는 정물 (1963)
레메디오스 바로, 할머니의 초상 (1926), 레메디오스 바로, 되살아나는 정물 (1963)

초현실주의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의 마지막 작품 <되살아나는 정물>은 정반대의 결을 보여준다. 식탁보가 촛불 주위를 소용돌이치며 과일들을 행성처럼 공전시키고, 씨앗이 떨어져 새 생명을 틔우는 장면이다. 이 그림을 완성하고 몇 달 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바로를 기려, 그의 동반자는 이 그림을 유족에게 전했다. 죽음을 앞둔 마음이 캔버스에 어떻게 다르게 새겨지는지를 보여주는 두 장면이다.

터너, 바다의 어부들 (1796), 터너, 무덤을 찾아서 (1850)
터너, 바다의 어부들 (1796), 터너, 무덤을 찾아서 (1850)

세 번째 이유는 세상이 뒤늦게 알아본 경우다. J.M.W. 터너의 후기작은 당대 평론가들에게 "비누거품과 세탁물"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형태를 스러뜨리고 빛과 색만 남긴 그림은 그저 실력이 무너진 결과로 취급됐다. 하지만 평론가 존 러스킨은 그를 "근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르며 옹호했고, 훗날 미술사는 터너의 후기 작업을 인상주의와 추상미술을 앞서 예견한 혁신으로 다시 썼다. 당시엔 몰락처럼 보였던 것이, 지나고 보니 도약이었던 셈이다.

고야, 승리한 한니발 (1771), 고야, 보르도의 우유 짜는 여인 (1825-27)
고야, 승리한 한니발 (1771), 고야, 보르도의 우유 짜는 여인 (1825-27)

네 번째 이유는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이름표 자체가 생각보다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마지막 작품군 중 하나인 <보르도의 우유 짜는 여인>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어둡고 음울한 '검은 그림들'과 톤이 너무 달라,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고야의 작품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해왔다. 이번 카드뉴스에 달린 댓글 중에도 "이 그림 제목은 '집 열여섯 채 풍경'인데 실제로는 열일곱 채가 그려져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는 미술사가들이 한 작가의 작품을 놓고도 얼마나 많은 해석과 논쟁을 거듭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타르실라 두 아마랄, 예수 성심 (1904), 타르실라 두 아마랄, 집 열여섯 채가 있는 풍경 (1967)
타르실라 두 아마랄, 예수 성심 (1904), 타르실라 두 아마랄, 집 열여섯 채가 있는 풍경 (1967)

결국 이 여덟 명의 화가가 보여주는 건, 하나의 작품이 그 사람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미술관에 걸려 이름값을 인정받는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 사이에는, 그 화가가 통과한 수십 년의 시간과 선택, 상실이 있다. 예투가 주목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이미 완성된 걸작 한 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작가가 자신의 스타일을 밀고 나가는 여정 자체를 응원하고, 그 과정에 함께 투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유명해지기 전이든 이후든, 더 다양한 장르와 국적의 창작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해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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